구시마 성
구시마 성터

구시마 성은 오무라 만으로 뻗어 있는 작은 반도의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무라 가문의 거처였습니다.
돌로 된 성벽과 해자는 지금은 오무라 공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바깥쪽 해자를 메워 공원용지로 만들었고, 안쪽 해자에는 수천 송이의 꽃창포를 심었습니다.
1992년에 남쪽 외벽에 이타지키 망루가 재건축되었는데, 이 망루는 17세기 성루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구시마 성은 1599년에 근대 초기의 오무라번 초대 다이묘(넓은 영지를 다스린 대영주) 번주인 오무라 요시아키(1569~1616)의 명으로 지어졌습니다.
관백(関白, 천황의 보좌관)이자 훗날 일본의 사실상 통치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로부터 요시아키는 1587년에 있었던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을 지원했다고 하여 작위를 받았습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요시아키는 라이벌인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 간의 권력 항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오무라 가문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요시아키는 오무라 만에 구시마 성을 건설할 것을 명했고, 1599년에 성이 완공되자 일족을 내륙의 작은 성에서 더 요새화된 이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구시마 성은 바다로 이어지는 연속된 해자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북쪽에는 반도의 해안에서 상륙하는 적의 접근을 늦추기 위해 설계된 4m 깊이의 숨겨진 해자가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망루가 갖춰진 높은 돌벽이 더욱 방호 능력을 높였습니다.
번주는 구시마 성의 가장 안쪽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의 단층 저택에서 살았습니다.



구시마 성의 건물군은 1614년에 오무라번 제2대 번주인 스미요리(1592~1619)에 의해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스미요리는 1607년에 노련한 쇼군인 가토 기요마사(1562~1611)의 조언을 받아 구시마 성을 확장하고 방위를 강화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기요마사는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구마모토 성의 설계를 감독했는데, 구마모토 성은 1877년에 약 2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에도 견뎌냈습니다.

구시마 성 외곽의 방위는 ‘오기노코바이(扇勾配, 부채 경사)’라는 구조로 부채꼴로 펼쳐져 있으며 폭이 넓은 토대를 가진 돌 성벽에 의해 강화되었습니다.
이 형상은 벽에 안정성을 더하고 공격자가 성벽을 오르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외벽을 따라 여분의 망루를 세운 것도 아마 이때였을 것입니다.

구시마 성은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가 1867년에 끝나고 성이 명도된 후 역할을 다하는 1871년까지 오무라 가문의 거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당시 메이지 정부 아래에서 일본의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많은 성을 비롯한 막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들이 사라졌습니다.
오무라 신사는 오무라 가문의 조상들을 대대로 모시기 위해 1884년에 내륙 부지에서 구시마 성의 안쪽으로 이전되었습니다.

구시마 성은 육지와 수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지어졌지만, 공격받은 적은 없습니다.
결국, 변화하는 시대에 밀려났습니다.